금성(金星)에게로 - 12: 戀戀不忘 (2024)

위무선은 그 뒤로도 이틀이 더 지난 뒤에야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 그는 의료원의 병실에서 벗어나 남망기와 함께 지내는 정실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비록 정실에 와서도 여전히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요양 신세였지만, 어쨌든 위무선은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 것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물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게 완전히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산책을 하더라도 반 시진을 넘기면 안 된다는 의원의 당부가 있었고, 산책마저 이런 마당에 활 연습은 고사했다. 그 외의 신체 활동 역시 어림도 없었다. 위무선은 앞으로 일주일은 더 활을 쥐면 안 된다는 사실에 절규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위무선의 안위에 유달리 까탈스럽게 구는 남망기는 아예 그의 시야에서 활을 치워버렸다. 활을 치울 당시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에서 위무선은 그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아아…. 심심해….“

활을 빼앗기고 정실 요양 생활을 시작한 위무선은 자연스럽게 시간 부자가 되었다. 현대에서는 누려보지 못한 여유며 호사지만, 그는 차라리 몸이 바쁜 게 더 나았다.

첫날에는 침상에 누워 멍하니 허공을 보며 홀로 사색에 잠겼다.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며칠 전, 그가 아직 의료원에 있을 당시 꾸었던 기묘한 꿈이었다. 꿈 속의 위무선은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꿈에서 깨어난 위무선은 그의 정체를 알았다. 그는 누가 봐도 남망기였다. 그토록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남망기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꿈의 내용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그토록 애절한 그리움과 슬픔을 느낄 일이 무어가 있다고.

위무선은 괜히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남망기의 뺨에 가닿았던 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꿈 속의 풍경이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위무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가 느낀 서러움도, 흘린 눈물도, 남망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기실 다음날 자고 일어났을 때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불현듯 현대에 있을 적 자주 꾸었던 꿈이 떠오르긴 했다. 주기적으로 꾸는, 일어나고 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정체불명의 꿈. 항상 위무선이 울면서 일어나 제 숨통이 붙어 있음을 확인하게 만들던 환상. 하지만 그건 현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망기와 만나기도 전에 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무렴, 자신이 그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고 울면서 깨어난 건 벌써 스무 해가 훌쩍 넘은 일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아, 몰라! 모르겠어!“

위무선이 두 손으로 볼을 치듯이 감싸쥐며 외쳤다. 괜히 다리를 동동 구른다. 이유도 알 수 없는 꿈을 머리 아프게 오래 붙잡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으니까.

그래. 꿈에 남잠이 나오는 게 별 대수야? 짝사랑하는 사람인데 꿈에 나올 수도 있지. 원래 꿈이란 건 생각의 흐름이 만들어낸 의미불명의 집합체 같은 거야. 내가 남잠을 좋아하니 그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과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합쳐져서 꾸게 된 꿈이겠지. 원래 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고 했어.

오. 위무선이 갑자기 작게 탄식했다. 아무렇게나 떠오르는대로 꺼내든 생각이 제법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론에 감탄하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곤 납득했다. 아무래도 저게 맞는 것 같다. 저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더 머리를 싸매며 고통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제멋대로 결론을 내린 위무선이 깔끔하게 꿈에 대한 고민을 머릿속에서 잘라냈다. 머리를 가득 채웠던 잡념이 꿈속의 꽃잎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외면이나 다름 없었다.

그로부터 또 이틀이 지났다. 위무선이 참을 수 없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지루함과 심심함이었다. 움직임이 제한되자 위무선은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도 더 없겠다, 자연스럽게 정실 안에서 새로운 놀이를 찾아다녔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화선지 위에 각종 그림을 그리며 놀더니, 오늘은 또 평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정실 안 남망기의 책장을 뒤적거리는데 재미를 붙였다.

바깥에서는 얇은 부슬비가 내렸고, 계절은 가을이었다. 한마디로 책을 읽기 딱 안성맞춤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시일이 꽤 지난 덕에 서책을 읽는 일에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 서책 몇 개를 무작위로 빼서 침상에 앉아 읽어내리던 위무선은 남망기의 책장에 유독 사후세계와 관련된 서책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운심부지처의 아정집이라거나 야렵일지, 그가 평소 읽고 필사하는 듯한 불경 등의 책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사후세계와 관련된 서책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남잠과 사후세계라니. 의외다. 근데 진짜 하나도 안 어울려. 위무선이 작게 웅얼거리듯 읊조렸다.

남망기는 항상 현실에 두 발을 딱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쏟지 않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는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일견 허황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사후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위무선에게는 신기할 뿐만 아니라 다소 생경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그 속에 담긴 내용도 한 갈래에 국한되지 않고 무척이나 다양했다. 정말로 사후세계 자체에 관심을 가진 이가 폭넓게 찾아본 티가 났다. 위무선은 빠르게 서책을 훑다가 불현듯 서안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남망기에게로 데구르르 시선을 굴렸다.

”남잠, 남잠.“

”왜.“

위무선의 부름에 남망기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침상에 앉아 상체를 앞쪽으로 수그린 위무선이 씨익 웃으며 손에 든 서책을 흔들었다.

”이런 데 하나도 관심 없을 것 같더니, 사후세계에는 대체 왜 관심을 가진 거야? 요즘도 관심 있어?“

”아니.“

”정말? 그럼 옛날에는 왜 관심 있었던 건데?“

그 질문에 남망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대답할 말을 고르고 또 골라 모나지 않게 정돈하는 기색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답을 기다리며 손에 쥔 서책을 휙휙 넘겨보던 찰나, 남망기의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만일 떠나간 이가 사후세계 같은 곳에 간다면 그곳은 구체적으로 어떤지 궁금했어. 충분히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인지, 아름답고 아늑한 곳인지….“

두루뭉술한 답이었다. 그가 고심하며 정리한 게 잘 깎인 원석이 아니라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이었던 모양이다. 위무선은 마음 한구석을 차츰 물들이는 어두운 기운을 애써 외면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으며 딱딱한 직선을 그렸다. 그가 들고 있던 책을 탁 덮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면 도가 쪽 서적은?“

”혹시 몰라서.“

남망기는 죽어본 적이 없으니 망자가 정확히 어찌 되는지도 몰랐다. 그저 통념적인 상식과 그 외 서적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불분명한 정보가 끝이라는 뜻이었다. 하여 그는 일단 사후세계에 관해 저술한 서책을 닥치는 대로 닥닥 그러모아 독파했으리라. 위무선은 어렵지 않게 서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읽는 남망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불교적인 색채를 지닌 그가 도가의 서책까지 읽은 게 의외이면서도,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쪽까지 손을 뻗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무선은 재차 열리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돌아온 답을 듣자 뒤늦게 그가 왜 어울리지도 않는 사후세계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았다.

또 그 사람 때문이겠지.

사별한 남망기의 도려, 이릉노조 위무선.

그 이름을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누군가 망치로 마구 내리치며 무자비하게 으깨버리는 것 같았다. 위무선은 저도 모르게 심장 위로 제 한 손을 가져가 올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은 멀쩡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만은 여전했다. 참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살덩이 위로 반달 모양의 흉이 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위무선은 그보다 심장 한구석이 더 아팠다. 너무나 아파서 당장이라도 그 부분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알았다. 그 심장에 새겨진 것이 남망기란 이름 석 자임에 위무선은 영원토록 그것을 도려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위무선의 어둑한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움직이는 속눈썹을 따라 짙은 음영이 늘어진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남망기를 향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확신한 게 고작해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일단은 몸부터 다 회복한 다음에 마저 생각하자고 애써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현실을 마주하게 되니 여간 속이 쓰린 게 아니었다. 이미 남망기의 삶 곳곳에 이릉노조가 깊숙이 스며들어 갑자기 이 땅에 떨어진 이방인인 위무선 따위는 끼어들 틈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영원히 그 사람을 이길 수도, 넘어설 수도 없겠구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남몰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위무선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누군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아로새겨진 이를 제칠 방법을 도통 떠올릴 수 없었다. 이건 위무선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단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이 위무선을 집어삼켰다. 아무리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지만, 위무선에게 이는 마지막 사랑이기도 했다. 혹자가 어찌 그리 확신하냐 묻는다면 오로지 직감이라고밖에 답할 말이 없었으나, 위무선은 실로 그리 생각했다. 남망기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느꼈던 운명이 그에게 알려주었으니까. 이 짧은 인생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는 존재는 저 사람 밖에 없을 거라고.

마음이 꽉 막힌 좁은 상자 안에 갇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구차하고 속 좁은 일이란 걸 잘 알면서도 흘러가는 마음을 도무지 걷잡을 수 없었다. 누구는 이렇게 난리통인데 정작 남망기는 자신을 이런 쪽으로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리라 상상하니 더더욱 속이 상했다.

”왜 이제는 관심 없어.“

위무선이 침상 위에 마구잡이로 펼쳐놓았던 서책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질문했다. 이 서책들의 의미를 알자 관심이 뚝 떨어져서 더는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꼴도 보기 싫었다. 열린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닫고 대충 턱턱 쌓아놓는 것은 결코 사심 섞인 행동이 아니었다.

”필요 없어서.“

그런 위무선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던 남망기가 여상히 답했다. 위무선은 왜 필요 없어졌냐는 둥의 질문 서너 가지를 입안에서 굴리다가 이내 모두 삼켜냈다. 대화를 길게 끌어봤자 기분만 울적해질 것 같았다. 위무선은 더 이상 자신이 얼마나 볼품없는 사람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가망 없는 사랑 앞에서 이토록 초라하고 나약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몸이 허약하니 마음마저 같이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위무선은 시큰해지는 눈시울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면 남망기가 당황할 테고, 그가 눈물의 연유를 묻는다면 위무선은 할 말이 없었다.

위무선은 서책을 대충 바닥에 내려둔 채 다시 침상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눌러 쓰자 모든 빛이 차단됐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게 다 어둠이었다. 위무선은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마음 같다고 느꼈다.

”나 졸려. 다시 잘 거야.“

위무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더 크게 말하면 젖은 목소리가 들킬까 두려웠다. 어차피 남망기라면 미세한 음성이라도 잘 알아들었을 테다.

그는 이제 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표명하기라도 하듯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부드러운 베개에 볼이 눌렸다. 불편하고 거슬렸다. 그 감각이 슬금슬금 살결을 타고 올라가 눈 속에 스며들었다. 눈 안쪽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누군가 눈꺼풀을 도화선 삼아 성냥불을 붙여둔 것 같았다. 두어 번 눈을 깜빡여 진압시키고자 노력했으나 불길은 그 하찮은 노력을 비웃으며 더더욱 부피를 키워갔다. 세차게 타오르는 불꽃은 통상적인 붉은빛이 아닌 푸르른 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이윽고 눈 안쪽을 완전히 점령한 불꽃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바깥세상을 침범했다. 불꽃의 편린을 머금은 물방울이 하나, 둘 흘러내렸다. 분명 차가워야 할 이슬은 위무선이 이제껏 느껴본 그 어떠한 온도보다도 뜨거웠다. 위무선은 그 열기에 데는 것이 자신의 볼인지, 아니면 아린 마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남망기에게 이 사실을 들키지 않게 최대한 숨을 죽일 뿐이었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천은 뜨거운 눈물마저도 부드럽게 포용했다.

위무선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울고 또 울어도 상처 입은 심장을 고치기란 불가능이었다. 오히려 눈물을 쏟아낼수록 심장에 진 멍울이 덧나고 아려왔다.

위무선은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엉망이고 최악이었다.

일주일이 더 지난 뒤에야 위무선은 일시적으로 압수당했던 활과 재회했다. 그즈음에는 위무선의 몸도 완전히 다 회복되어 있었다. 위무선이 쓰러지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남망기는 여전히 걱정이 태산 같았으나, 활을 손에 쥐고 방방 뛰며 기뻐하는 위무선을 보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의원마저도 이제는 거의 완치에 가깝다고 판명했으니 여기서 더 쉬라고 해봤자 구차할 뿐이었다.

하지만 몸이 다 나았다는 게 마음까지 다 나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위무선의 마음은 오히려 다치기 전보다 수십 배는 더 심란해졌다. 그는 도저히 남망기를 똑바로 마주 보며 전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그를 보기만 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고, 심지어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는 단순히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자신이 멋대로 사별한 정인까지 있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 혼자 유난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를 향한 마음이 정리하고 싶다고 정리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게 아니란 걸 깨달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차라리 슬픔과 죄책감에서만 그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도 결국 한낱 사람인지라 저런 감정을 넘어 남망기를 향한 원망이 치솟을 때도 있었다. 차라리 당신이 나에게 조금만 덜 다정했더라면, 덜 상냥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이리 되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한 마디로 지금 위무선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스스로 땅을 푹푹 파고 들어가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다. 심지어 그 가시밭길은 혼자 불타올랐다가 얼어붙었다가 폭풍이 불고 해일이 치는 둥 아주 다양한 난리를 선보였다.

싱숭생숭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남망기를 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남망기를 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를 보기가 힘겨우니 차라리 최대한 거리를 두고 마주치지 않아야겠다는 판단 끝에 나온 행동이었다. 전처럼 하루종일 붙어 있는 건 거의 위무선을 죽여달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상상만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음이 쑤시며 눈앞이 무너져내렸다. 남망기와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계속 얼굴을 맞대고 있느니 재수없는 공작새 자식과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하여 위무선은 남망기보다 일찍 일어나서 정실을 나갔다가, 종일 운심부지처를 배회한 뒤 남망기가 잠들고 난 이후 시간대에 슬그머니 정실로 돌아오는 기행을 선보였다. 식사는 부엌에 들어가 부탁하면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물론 오래 붙어 있진 않고 최대한 후다닥 해치운 뒤 자리를 떠났다. 위무선이 부엌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남망기가 그를 찾으러 올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한창 훈련에 열을 올리던 당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빠르게 수저를 입에 쑤셔 넣으며 족히 2인분은 되는 식사를 십 분만에 먹어치운 과거가 화려히 빛을 발했다.

위무선의 파격적인 행보에 운심부지처가 한 차례 술렁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위무선의 행동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 예상했지만, 불행히도 하루이틀이면 막을 내릴 거라 생각했던 기행은 닷새가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남망기는 나름대로 위무선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언제 귀가할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늦게까지 깨어 있기도 했고, 그가 갈 거라고 예측되는 장소에 가만히 앉아 기다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위무선은 이미 남망기의 머리 위에서 훨훨 날아 다니는 중이었다.

남망기는 갑작스럽게 돌변한 위무선의 태도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혹여 자신이 늦게 구하러 간 탓에 부상을 입어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실수를 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그는 위무선이 정실에 돌아오기 전까지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수없이 고민했으나, 마땅히 이렇다할 정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늦은 구명으로 화를 낼 거라면 진작 냈을 게 분명하거니와 남망기가 아는 위무선은 그로 인해 화를 낼 성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또 다른 잘못을 했다는 건데, 남망기로서는 도무지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에게 정답을 알려줄 유일한 존재는 그를 피하기에만 급급하니 남망기의 마음도 점차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최악의 상상이 그의 머리 한구석을 차지했다가 떠나갔다.

기분이 최하점을 찍은 채 서릿발 날리는 북풍을 휘감싸고 걸어다니는 남망기 덕분에 운심부지처는 때 아닌 겨울을 맞이했다. 남망기가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싸늘한 서리가 내려앉아 일대가 온통 쩍쩍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분명 계절은 풍요로운 가을이건만, 울창하게 너울진 초목들은 모조리 다 벌벌 떨며 숨을 죽였다. 운심부지처의 사람들 역시 모두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제발 두 사람이 하루 빨리 화해해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가길 바랐으나, 민첩하고 잽싸게 남망기를 피해 다니는 위무선을 보면 그런 일도 퍽 요원했다.

”망기야.“

어김없이 남망기가 위무선을 찾아 운심부지처 안을 돌아다니던 어느 느지막한 오후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부름에 남망기가 몸을 돌렸다. 무심한 눈이 바뀐 풍경을 담아냈다. 옆쪽으로 난 샛길에서 그의 형인 남희신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망기를 둘러싼 차가운 공기가 남희신 주변의 춘풍을 담은 온화한 공기와 뒤섞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남망기가 제 앞에 멈춰선 남희신에게 물었다.

”오늘도 위 공자를 찾아다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소득은 좀 있고?“

”…….“

몇 마디가 채 되지도 않는 가벼운 물음에 남망기의 마음이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그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꾹 다물린 동생의 입매를 바라보던 남희신이 고개를 옆으로 슬 기울였다.

”알 수가 없구나. 대체 위 공자가 왜 너를 피하는 것이냐?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지 않아.“

”…저도 모르겠습니다.“

남망기가 할 수 있는 답은 정말로 저게 다였다. 누구보다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남망기였다. 그는 위무선이 자신을 피하는 연유를 알 수만 있다면, 그들의 관계를 다시 이전처럼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가 위영에게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모르겠습니다.“

남희신은 찬찬히 눈앞의 제 동생을 뜯어봤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냉랭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남희신이 보기에 지금 그의 동생은 무척이나 풀이 죽고 힘없는 상태였다. 미세하게 내려간 어깨와 아주 약간 처진 눈썹이 그 반증이었다. 남들은 쉬이 읽어낼 수 없는 변화였으나 남희신은 이미 남망기의 의중을 읽는 일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은 천하의 함광군이 시무룩해질 줄도 아는 사람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 그 차이를 읽어내는 게 남희신 한 사람 뿐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위무선도 눈치채는 사람에 해당하지만, 지금 그는 남망기의 얼굴마저 제대로 보려 하지 않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운심부지처의 다른 수사들이 내게 와서 이야기하더구나. 함광군께서 냉기를 풀풀 풍기고 다니니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말이다.“

”그렇습니까.“

남망기가 짧게 답했다. 하지만 상투적인 대답일 뿐 그 속에 담긴 알맹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무선에게 온 신경이 쏠려 하루하루 마음이 애달프게 닳아가는 와중에 날 선 기세를 갈무리할 정신까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남망기는 그럴 시간에 일 초라도 빨리 위무선을 만나 대화하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불안과 걱정이란 망치가 마구 내리쳐 쩌적쩌적 금이 가고 있는 이 마음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었다.

그런 남망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던 남희신이 은근히 물었다.

”정 그러면 이 형장이 좀 도와주랴.“

”…어떻게 말입니까?“

남망기의 눈이 올곧게 남희신을 응시했다. 남희신은 지금 그의 동생이 아닌 척 제법 솔깃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귀가 아닌 척 쫑긋 세워져 자신이 할 다음 말에 온 초점이 쏠려 있지 않던가. 남들은 남망기더러 무뚝뚝하고 냉철한 함광군이라 칭하지만, 남희신에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귀엽고 솔직하지 못한 동생이었다. 귀여운 동생을 위해 힘이 닿는 곳까지 도와주는 건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다 방법이 있지.“

말을 마친 남희신이 깊게 웃었다. 그에게는 이미 필사적으로 남망기를 피해 다니는 위무선과 그를 애타게 찾아 돌아다니는 남망기를 만나게 할 방법이 있었다.

”택무군께서 절 찾으신다고요?“

오늘도 열심히 남망기를 피해 운심부지처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던 위무선은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남가 수사에게 되물었다. 위무선이 수상쩍은 눈초리로 수사를 바라봤다. 명백한 불신의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희신은 한 번도 자신을 개인적으로 불러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마주치면 인사하거나 짧은 담소를 나누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남희신이 자신을 부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위무선의 눈총을 받은 남가 수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위 공자를 만나면 반드시 한실로 오시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혹시 무슨 할 말이라고 하시던가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위무선이 작은 비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수상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택무군의 부름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남망기의 형이자 자신이 의탁하고 있는 운심부지처의 종주였다. 위무선이 이곳에 객으로 머무는 이상 택무군의 부름을 모른 척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남망기의 가족이니 밉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일단 무작정 피해 다니고 있지만, 그래도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가족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잘 보이고 싶었지 못난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갈등하던 위무선이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한실로 가볼게요.“

위무선의 말에 남가 수사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위무선은 역시 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했다. 남가 수사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긴 위무선이 그대로 뒤돌아 한실로 향했다. 한참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위무선은 문득 멈춰서 운심부지처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드넓은 운심부지처는 아직도 종종 압도적인 감각을 느낄 정도로 거대하고 운치 있었다. 처음에는 이 넓은 곳의 길을 언제 다 외워서 다니나 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쓱쓱 돌아다니게 됐다니. 새삼 이곳에서 지낸 몇 달 사이에 자신이 얼마나 운심부지처에 녹아들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 요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은 분명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데, 이제는 여기가 그곳만큼이나 익숙해졌다니. 하여튼 사람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위무선은 꿈틀꿈틀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 또 다른 감정을 뒤로한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한실까지는 곧이었다.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한실로 발을 디딘 위무선이 남희신과 나란히 마주 앉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위무선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 봤다.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에서는 좋은 향이 물씬 풍겼다.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는 향이었다.

찻잔을 빤히 응시하는 위무선을 보며 남희신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화가의 붓놀림이었다면 분명 극찬을 받았을 만큼 유려한 곡선이었다.

”드셔보시지요. 이번에 들어온 찻잎인데, 향만큼이나 맛도 좋답니다.“

”네. 감사합니다, 택무군.“

어색하게 답한 위무선이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려 찻물을 조금 입안에 머금었다. 과연 남희신의 말처럼 뛰어난 맛이었다. 다도 쪽에 그다지 깊은 조예가 없는 위무선도 절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짝 말랐던 입안이 찻물에 적셔졌다. 따뜻한 찻물이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답답하게 막혔던 목구멍도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위무선의 표정이 느슨히 풀렸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남희신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요즈음 운심부지처에서 지내는 건 좀 어떠십니까? 불편한 건 없나요?“

”제가 불편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갑자기 찾아온 객인 절 이리 오래도록 잘 챙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객이라니요. 처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운심부지처를 집으로 여기며 편안히 지내시라고요.“

”하하….“

위무선은 그에게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색한 웃음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의 말처럼 위무선은 운심부지처에서 아주 편안히 지냈고, 이곳을 집처럼 친숙히 여기게 됐다. 그만큼 운심부지처의 사람들이 그를 잘 챙겨줬다는 뜻이니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망기를 향해 이루어질 수 없는 깊은 감정을 품게 된 이상 이제 이전처럼 친숙함을 느끼긴 어려울 테다. 위무선에게 운심부지처는 곧 남망기였으니까.

그리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위무선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몇 달이나 지낸 장소에 정이 붙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위무선이 다시 찻잔을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차를 마셨다. 삽시간에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고요한 눈빛으로 위무선을 살피던 남희신이 재차 물었다.

”헌데, 요즘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고민거리라니요?“

곧장 답하는 위무선의 고개가 옆으로 슬 기울어졌다.

”제가 말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망기와의 사이가 소원해지신 듯하여. 혹시 망기가 위 공자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남희신의 물음에 위무선이 펄쩍 뛰며 외쳤다. 그를 감싸고 있던 평온함이 순식간에 깨진 유리조각처럼 무너져내렸다. 위무선은 손 위에 올려진 찻잔만 아니었더라면 두 손을 휘적거리며 최선을 다해 그 말을 부정했을 터였다.

그의 격한 부정에 남희신이 눈에 띄게 안심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손에 들린 작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진중한 낯으로 위무선을 직시했다.

”그렇다면 혹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에 위무선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말씀해드리기 곤란해요. 그치만 이건 따지자면 남잠의 잘못이라기보단 제 잘못에 훨씬 가까워요. 괜히 택무군을 신경 쓰이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하네요.“

”위 공자가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혹시 망기와 대화를 통해 해결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모르겠어요. 물론 평생 남잠과 안 만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은 조금…….“

위무선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아직 정확한 행동 방향을 정하지 못해 한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남망기를 향한 마음을 접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전처럼 대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망기를 마주해봤자 괜히 어색하게 굴어 사이만 더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은 절대 사절이었다. 남망기와 더 가까워지고 싶지도, 더 멀어지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이 위무선을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대화를 할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으시다는 거지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순식간에 화색이 된 남희신의 물음에 위무선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만일 대화로 이 복잡한 마음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대화란 게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위무선 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망기를 눈앞에 두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또한 대화를 나눠도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전혀 생겨나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위무선이 남망기를 향한 마음을 접거나 남망기가 그를 받아주어야 했다. 하지만 전자는 절대 불가능이란 걸 깨달은 게 고작해야 얼마 전이었고, 후자는 그보다도 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남망기가 그토록 사랑했다는 사별한 도려가 여전히 그의 마음 깊이 남아 아름답게 웃고 있을 테니까.

복잡한 위무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는 낯의 남희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무선은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짙은 눈동자 속에 당황이 뒤섞였다. 그의 고개가 일어선 남희신을 따라 위로 꺾였다. 눈이 딱 마주치자 남희신의 눈매가 반달 모양을 그리며 부드러이 휘었다.

”저는 원하는 답을 들었으니 이만 일어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위 공자. 그리고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남희신이 예를 갖추어 위무선에게 인사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일견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네?“

하지만 그건 남희신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위무선이 한 박자 늦게 반문했다. 그는 그게 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며 남희신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보다 남희신의 입이 다시 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망기야. 들어오거라.“

”……남잠?“

위무선이 닫혔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경악했다. 입이 볼품없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나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눈을 비벼봤지만, 펼쳐진 광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요한 낯의 남망기가 완전히 방으로 들어왔다. 위무선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자 바쁘게 눈을 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방법이 없었다. 출구인 문은 남망기가 굳게 막고 있었고, 창문을 통해 나가자니 창틀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붙잡힐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남희신과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망기를 뚫고 이 방을 탈출하는 게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도 전혀.

”위 공자. 망기와 한 번 천천히 대화를 나눠보시지요. 요즈음 운심부지처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많이 걱정하고 있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택무군!“

위무선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부여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남희신은 그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인자한 미소와 함께 물러났다. 탁,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위무선은 그가 빠져나간 자리를 넋이 나간 채로 바라봤다. 설마하니 그 사람 좋은 남희신이 이런 일을 꾸밀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까닭이었다. 위무선은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가 제 동생을 아끼는 마음을 너무 얕봤다. 수상하다는 걸 느꼈을 때 체면 차리지 말고 그냥 도망쳐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자신의 앞에는 며칠 간 열심히 피해왔던 남망기가 있었다.

”위영.“

남망기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그려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위무선은 어쩔 도리 없이 그에게로 향하는 제 시선을 느꼈다. 남망기가 눈앞에 나타난 이상 이 술래잡기는 이미 위무선의 패배였다. 위무선이 저토록 애틋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부르는 남망기를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앉아.“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남망기가 조금 전까지 남희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옷매무새를 갈무리하고 앉았다. 그가 여분의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진녹색의 찻물이 텅 빈 잔을 채워나갔다. 며칠간 열심히 위무선을 찾아다닌 사람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분하고 침착한 몸가짐이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남망기와 하등 다를 바 없어 위무선의 마음도 덩달아 고요히 가라앉았다. 남망기의 행동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는 박차고 일어났던 자리에 엉거주춤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낫다. 이것은 위무선이 마음에 항상 품고 살아가는 문장 중 하나였다. 어차피 남망기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여전히 운심부지처에 몸을 위탁하고 있었고, 운심부지처의 사람들은 위무선보다 남망기의 편이었으며, 무엇보다 위무선은 아직 정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생활 반경이 똑같은 이상 이 술래잡기의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남망기가 죽기살기로 운심부지처를 헤집고 다니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위무선이 열심히 긍정적인 희망 회로를 돌렸다. 그는 남망기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날이 예정보다 조금 당겨진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계속 외면하고 피하는 것도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쭈뼛쭈뼛 남망기의 눈치를 보며 다 식은 차를 들이마셨다. 아까는 분명 맛있었는데, 지금은 이게 정확히 무슨 맛인지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위무선은 이것이 꼭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남망기는 기껏 따른 차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위무선만을 바라봤다. 마치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위무선은 남망기의 눈치를 보며 살살 눈을 굴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움찔 떨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꼭 큰 잘못을 저지르고 끌려온 기분이었다.

”위영.“

마침내 나지막한 남망기의 목소리가 다시금 위무선의 이름을 불렀다. 위무선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망기가 착잡한 낯으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내가 너에게 무언가 실수한 게 있어? 지난 며칠간 너를 찾아다니며 계속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그 말에 위무선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는 남망기가 가장 먼저 왜 도망 다녔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먼저 남망기를 피한 건 위무선이었으니까. 지금 이 사태는 객관적으로도 위무선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남망기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도망의 이유를 물어보지도, 위무선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위무선에게 물었다.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게 있느냐고.

있지도 않은 잘못을 되물어오는 남망기의 행동에 위무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알려줘. 사과하고 싶어.“

남망기가 말을 끝내며 슬쩍 위무선의 눈치를 살폈다. 은근히 살핀다고는 했지만 위무선에게는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 작은 눈짓 하나에 순간 마음이 술렁였다. 잔잔해졌던 호수가 다시 요동쳤다. 그는 울컥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갈무리하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런 거 없어. 남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너는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진짜야.“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줘.“

”정말이라니까? 남잠. 생각해 봐. 너는 나를 운심부지처에서 마음대로 지낼 수 있게 해줬고, 내가 위험할 때마다 지켜줬고, 심지어 간호까지 해줬잖아. 넌 내게 호의만 베풀었어. 실수 따위 한 적 없다고. 너를 피해 다녔던 건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였어. 괜히 신경 쓰게 만들었다면 미안해.“

”…….“

남망기가 침묵했다. 하지만 위무선의 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 듯 눈썹은 까딱 위로 올라가 있었다. 위무선을 응시하는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위무선은 탁자 아래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주먹을 쥔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의 눈빛을 견뎌내기가 버겁기 때문도 있지만, 저렇게 나열하고 나니 정말 자신이 남망기에게 도움 밖에 안 받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의로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 심지어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배은망덕한 감정을 품었다니. 나는 정말이지 구제 불능 쓰레기야. 위무선이 속으로 제 머리를 왕창 쥐어박으며 생각했다.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위영 너… 지금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흘러나오는 남망기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 속에 서린 것은 분명 설원의 눈폭풍보다도 시린 얼음 파편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어.“

위무선이 제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남망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자리가 마련된 이상 남망기 역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애타는 초조함을 견딜 수 없었다. 지지부진한 상황을 며칠 더 끌고 가느니 여기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풀린 것 하나 없이 자리가 파하면 위무선은 더 열심히 자신을 피해 다닐 테니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했어? 빨리 구하러 가지 못해 널 다치게 만든 거? 아니면 일주일 동안 활을 압수한 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네 감정이 상했다면….“

”그만! 그만해, 남잠!“

위무선이 더는 참지 못하고 두 손바닥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며 외쳤다. 갑작스러운 굉음과 위무선의 외침에 남망기의 말이 맥없이 끊겼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이 갑작스러운 진동의 반동으로 흔들렸다. 반쯤 차 있던 찻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았다. 하지만 찻잔 바로 옆에 놓인 위무선의 손은 상황이 달랐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초라하게 떨리고 있었다. 꼭 강풍에 휩쓸린 사시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남망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며 위무선을 응시했다. 긴 속눈썹이 나붓하게 움직였다. 위무선이 그의 이야기를 싹둑 잘라버렸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그 눈빛이 위무선을 더더욱 자극했다. 가까스로 가라앉힌 마음에 또 한 번 거센 풍랑이 일었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풍랑이었다. 그것은 슬픔이기도 했고, 원망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 밖의 수많은 감정이기도 했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검은 색채들이 앞다투어 위무선의 마음을 물들였다. 격해진 감정을 따라 자연스럽게 눈시울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얼마 전 느꼈던 화마가 다시금 지글지글 들끓였다. 위무선은 그 불길을 가라앉히는 방법 따위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위무선이 억세게 악물었던 입을 열었다.

”너는 왜 자꾸 너한테서만 이유를 찾아? 나한테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남잠 너는 나한테 충분히 잘 해줬어. 분에 넘칠 정도로 잘 해줬다고! 나는 네가 아니었으면 거기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라. 활을 압수한 건 내 몸을 걱정해서 그런 거니 신경도 안 써!“

격정적인 위무선의 목소리가 한실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는 분에 겨워 씨근덕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 참이었다. 여기서 떠나버리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위무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남망기가 본인에게서 이유를 찾는 모습이 보기 불편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분명 아무도 없을 테니까.

지금 상황만 해도 그렇다. 잘못은 위무선이 했는데, 자책은 남망기가 하고 있었다. 위무선은 이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위무선만 생각하는 남망기가 답답했다. 그 속에 담긴 섬세한 배려와 지독한 다정함이 괴로웠다. 남망기가 자신을 얼마나 깊은 호의로 대하는지 느낄 때마다 위무선의 정신은 한없이 아득해졌다. 저 먼 우주로 빠져나가 은하수를 건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향해가는 것 같았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씩씩대는 위무선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망막에 새겨 넣은 남망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게 일견 목이 멘 것도 같았다. 언제나 옥구슬이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것 같던 목소리에 미묘한 불협화음이 피어났다.

”그렇다면 왜 날 피했어? 너는 잘못한 게 없으니 당연히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유를 모르겠어, 위영.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알지 못해.“

샛노랗게 빛나는 금성이 위무선의 직선 자리에서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네가 알려줘.“

침잠한 목소리가 그려내는 이름은 여전히 사무치게 다정했다. 이 세상의 가장 부드럽고 온난한 색채를 닥닥 그러모아 음성의 형태로 내보내는 것처럼. 흘러가는 파도의 물거품과 밤하늘의 별무리를 목소리 곳곳에 흩뿌려놓은 것처럼.

그 한결같은 따스함에 위무선은 결국 또 한 번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위무선은 자신을 휩쓸고 지나가는 감정의 파도에 온몸을 내던졌다. 속에 쌓아온 말들을 내뱉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이번에도 참아낸다면 당장이라도 묵직한 바위가 심장을 짓눌러 터트려버릴 것 같았다. 터진 심장의 잔해는 파도 속에 뒤섞여 방파제를 만나 이윽고 산산이 부서지겠지. 다시는 돌이킬 수조차 없도록. 다시는 예전의 형태를 복구할 수 없게. 위무선에게는 그 일련의 흐름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 자리에서 모든 걸 쏟아내야 했다. 이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남잠.“

”응.“

남망기의 이름을 짧게 호명한 위무선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 부근이 부풀어 오르고, 폐부 가득히 신선한 공기가 차오른다. 스치듯 들려온 대답은 이미 신경 쓸 수 있는 선 너머에 존재했다. 짧은 한 차례의 호흡을 끝마친 위무선이 제대로 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목구멍에 치솟는 말을 마구 쏟아냈다.

”너는, 너는 왜 항상 나한테 이리 다정하게 굴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애틋해? 남잠 너, 진짜 함부로 이러는 거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잘못한 건 오히려 나라고!“

”…….“

남망기가 침묵했다. 위무선은 그의 묵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속에 쌓여 있던 울분을 토해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내가 너한테 단순히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객이고 친구일 뿐이라면, 나한테 이리 다정하게 굴어서는 안 돼. 제발 내가 멍청한 착각을 하게 만들지 마! 혹시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감을 품게 만들지 말라고!“

속에 쌓아뒀던 말을 우르르 쏟아낸 위무선이 거친 숨을 몰아셨다. 위무선의 새된 외침에 남망기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정확히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너 때문에 멍청한 선택을 하게 만들지 마. 제발 부탁이야….“

마주 앉은 위무선의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쌓여왔던 온갖 서러움이 응축된 물방울은 그리도 서글프게 탁자 위로 뚝, 뚝 떨어졌다. 그 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참함과 분함, 돌아가야할 곳에 대한 고뇌, 그 과정에서 받은 피로와 스트레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이제껏 차근차근 쌓여 왔던 것이 한번에 터져나왔다. 투둑 두어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순식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애수에 젖은 눈망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애처롭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남망기는 그 눈물을 목도한 순간 마음이 시큰거려 제대로 입을 떼어낼 수조차 없었다. 정신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하루종일 계편을 맞아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남망기의 반응을 뭐라고 판단한 건지 위무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망기를 쏘아보다가, 제 두 눈을 옷소매로 슥슥 닦아냈다. 값비싼 비단으로 만든 옷이라 눈이 따갑지는 않았다. 검붉은 옷자락은 오히려 제 눈물을 부드러이 훔쳐갔다. 그러나 이마저도 남망기의 호의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에 위무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다정함에 숨이 턱 막혀왔다. 다시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감정에게 목줄이 묶여 질질 끌려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그를 휘감싼 격랑을 따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최악이야. 정말이지 미워 죽겠어, 남망기!“

그 말을 끝으로 위무선이 몸을 돌려 한실을 뛰쳐나갔다. 높게 올려 묶은 흑단 같은 머릿결이 허공에서 물결쳤다.

남망기는 뛰어가는 위무선을 뒤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위무선이 떠나간 자리를 멀거니 두 눈에 새겨넣었다. 처음에는 위무선의 눈물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면, 이번에는 위무선의 목소리로 밉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게 물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위무선 앞에서 철저한 약자였고, 그의 눈물 한 자락만 봐도 마음이 미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물며 그러할진대, 위무선의 입으로 듣는 원망의 외침은 천 개의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남망기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야말로 애처롭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볼 사람도, 달래줄 사람도 모두 한실에 존재치 않았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이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으니까.

눈으로나마 위무선의 자취를 따라가는 남망기의 모습이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마도조사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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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Pres. Carey R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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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Pres. Carey Rath

Birthday: 1997-03-06

Address: 14955 Ledner Trail, East Rodrickfort, NE 85127-8369

Phone: +18682428114917

Job: National Technology Representative

Hobby: Sand art, Drama, Web surfing, Cycling, Brazilian jiu-jitsu, Leather crafting, Creative writing

Introduction: My name is Pres. Carey Rath, I am a faithful, funny, vast, joyous, lively, brave, glamorous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